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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소식

 

NEW [경제시평] 나쁜 디폴트와 스마트한 디폴트

(국민대 경영대학원 이은형 교수)

미국에서 온라인 쇼핑을 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큰 폭의 할인을 해주는 것처럼 광고하면서 구매를 유도하는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구매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구매하도록 설정이 돼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구매를 끝내겠다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구매가 이뤄지고 결제도 자동이다.  
 
언젠가 와인 프로모션에 솔깃해 결제했다가 추가 구매가 자동으로 이루어져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빽빽하게 적힌 구매조건 안에 작은 글씨로 ‘고객님이 해지하지 않으면 자동 연장할게요’라는 구절이 들어 있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쓴 느낌의 글씨였다. ‘나쁜 디폴트’의 사례다.

2007년 페이스북은 회원들의 쇼핑내역을 친구들에게 공개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회원들이 ‘공개하지 않겠다’고 적극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 이상 의류, 영화표, 심지어 약혼반지 등의 쇼핑 내역이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자동으로 공개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페이스북 회원들이 ‘내 프라이버시 침해를 멈추라’는 운동을 벌였고, 이 프로그램은 9일 만에 폐지되었다. 페이스북과 8개 광고회사는 2008년 집단소송을 당했다. 역시 ‘나쁜 디폴트’다. 

우리나라에도 ‘나쁜 디폴트’의 사례는 없지 않다. 이동통신사는 휴대전화 사용 약정을 할 때 기기값 할인에 대한 조건으로 불필요한 선택을 강요한다. 그런데 이런 선택사항은 소비자가 해지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유지되고 돈이 빠져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점원이 ‘6개월 후에 해지하세요’라고 안내하지만 소비자는 대체로 잊어버린다. 서비스의 지불액수도 소액이어서 소비자들은 인식하지 못한 채 그 디폴트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리처드 탈러는 ‘넛지’로 유명하지만 주목받아야 할 개념 중 하나는 ‘디폴트’다. 디폴트란 제품의 초기 설정을 의미하며, 소비자가 의도적으로 변경하거나 추가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경향(status-quo effect)을 가지고 있으므로, 제품 또는 서비스의 디폴트에 대체로 순응한다는 것이 탈러의 설명이다. 따라서 제품의 디폴트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고객의 만족도, 제품의 매력도가 달라질 수 있다.  

기업이 디폴트를 설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개별 고객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때는 상식선에서 설계한다. 가장 많은 고객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최적화한 ‘친절한 디폴트’, 고객의 선호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을 때 사용하는 ‘무작위 디폴트’가 여기에 속한다. 개별 고객의 선호도에 대한 정보가 있고 세분화된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경우 맞춤형으로 고안하는 ‘스마트 디폴트’, 확실한 고객 선호도를 알고 있는 경우, 즉 비행기 좌석을 자동으로 복도 측부터 배정하는 ‘고집형 디폴트’, 고객의 의사결정에 대한 실시간 정보에 따라 변동되는 ‘대응형 디폴트’ 등으로 나눈다. 반면 ‘나쁜 디폴트’도 있다. 고객에게 필요하지 않은 옵션을 디폴트로 설계해서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오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송이나 불매운동, 평판 리스크와 같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소비자가 노력을 적게 기울여도 제품을 만족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디폴트다. 소비자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수록 디폴트를 스마트하게 설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자들은 디폴트 설계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일선 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 또는 영업부서에 맡겨버린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학자의 조언에 경영자들이 귀를 기울여보길 바란다. 탈러의 수상에 힘입어 기업들이 ‘나쁜 디폴트’를 버리고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이로운 ‘스마트 디폴트’ 설계에 집중하기를!

 


원문보기: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36372&code=11171313&cp=nv